오래전 미국의 어느 조용한 시골 마을에 이런 이야기가 전해집니다. 해가 저물어가는 늦은 오후, 한 어머니가 밖에서 일하고 돌아올 남편과 아이를 위해 저녁을 지으려 집을 나섰습니다. 따뜻한 한 끼를 짓기 위해서는 추운 날씨 속에서 장작이 필요했기에, 어머니는 집 뒤편에 쌓아둔 장작 더미로 향했습니다.

하지만 장작을 집어 드는 순간 예상치 못한 일이 벌어졌습니다. 장작 더미 사이에 둥지를 틀고 겨울잠을 자던 독사 한 마리가 어머니의 손을 깊게 물어버린 것입니다. 선명한 이빨 자국과 함께 맹독이 순식간에 퍼져나갔습니다. 어머니는 간신히 집 안으로 들어와 응급신고를 했지만, 이내 눈앞이 희미해지고 극심한 어지럼증이 밀려왔습니다.
두려움이 몰려왔습니다. ‘내가 이대로 죽으면 남겨진 우리 가족은 어떻게 하지?’ 하늘 앞에 매달려 기도로 울부짖고 싶었습니다. 하지만 어머니는 그러지 않았습니다. 흐려지는 정신을 가다듬고 다시 몸을 일으켜, 화덕 앞으로 걸어갔습니다. ‘내가 이대로 세상을 떠나더라도, 사랑하는 내 가족이 집에 돌아왔을 때 따뜻한 밥 한 끼는 먹을 수 있어야 한다.’ 그 마음 하나로 어머니는 솟구치는 통증을 참아내며 장작불을 지피고 저녁을 짓기 시작했습니다.

뜨거운 불길 앞에서 음식을 만드는 동안 어머니의 온몸은 땀으로 젖었습니다. 이마에서 목덜미로, 다시 팔을 타고 흘러내린 땀은 뱀이 물었던 상처 안으로 스며들었습니다. 쓰라림이 손끝을 파고들었지만, 어머니는 손을 멈추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놀랍게도, 어머니는 응급차가 도착할 때까지 의식을 잃지 않았습니다.
무엇이 그녀를 끝까지 붙들었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 다만 의식을 잃지 않고 그 자리에 서 있게 한 것은 가족을 향한 마음뿐이었습니다. 그날 어머니가 하늘 앞에 올린 기도는 말이 아니라 땀이었고 마침내 무사히 생명을 건질 수 있었습니다.

우리는 흔히 ‘기도’라고 하면 거룩한 장소에서 두 손을 모으고 하늘을 향해 눈물 흘리는 장면을 떠올립니다. 물론 정성을 다해 드리는 기도는 그 자체로 숭고합니다.
하지만 기도는 정해진 시간과 장소에서만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 나에게 맡겨진 삶을 위해 진심을 다해 땀 흘리고 행동하는 그 모든 순간 역시 하나의 간절한 기도입니다.
지금 참어머님께서는 통일가 식구들과 평화 세계를 위해 홀로 깊은 고난의 노정을 걸어가고 계십니다. 그렇다면 이러한 때에 우리가 올려드릴 수 있는 기도는 어떤 형태여야 할까요?
교회 성전에 모여 올리는 정성의 기도는 무엇보다 귀합니다. 그리고 그 기도가 이어지는 자리가 하나 더 있습니다. 바로 우리가 살아가는 삶의 현장입니다. 직장에서, 학교에서, 일상의 모든 순간 속에서 참어머님을 향한 마음을 품고 자신의 위치에 최선을 다하는 것, 위하는 마음으로 하루를 살아내는 그 실천 역시 참어머님께 드리는 깊은 기도가 될 것입니다.

하늘 앞에 바치는 가장 진실한 기도는 성전에만 있지 않습니다. 오늘 내가 맡은 자리에서 흘리는 땀, 곁에 있는 사람을 위해 쓰는 마음. 그 하루하루가 곧 기도입니다.
기도의 형태를 정하는 것은 우리가 어디에 서 있느냐도, 어떤 자세를 취하느냐도 아닙니다. 성전이었는지 부엌이었는지도 중요하지 않습니다. 중요한 것은 그 안에 무엇을 담았느냐가 기도의 형태를 만듭니다. 그러니 우리가 드릴 수 있는 기도의 형태를 묻는다면, 그 답은 오늘 하루를 어떤 마음으로 살아내느냐에 달려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