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유복했던 집안의 엘리트 딸
저는 신앙을 선택할 것이냐, 학교를 선택할 것이냐를 결정해야 했습니다. 우리는 이화여대 김활란 총장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통일교회에서 주시는 말씀보다 더 훌륭한 진리를 저희에게 주시면 우리는 통일교회를 나가지 않겠습니다. 하지만 그렇지 않다면 저희는 통일교회를 선택하겠습니다.” 그렇게 우리는 신앙을 선택하고 이화여대에서 퇴학을 맞았습니다.
잘 다니던 이화여대에서 퇴학을 맞았으니 사람들은 제가 당시에 큰 핍박을 받았을 것이라고 생각할 것입니다. 하지만 다른 사람들과 달리, 저는 집안에서 그런 핍박을 받은 적이 단 한 번도 없습니다. 저희 집은 매우 유복한 집안이었습니다. 그 당시 천여 평이 넘는 넓은 집에서 생활했고, 제 밑의 일곱 명의 동생 모두에게 각각 가정교사가 붙을 만큼 풍족한 환경에서 자랐습니다.
어느 날은 제 동생이 통일교회 이야기가 신문에 자주 나오는 것을 보고 ‘누나가 다니는 곳이 어떤 곳인가’ 궁금해 직접 가보았다고 합니다. 그날 말씀을 듣고 돌아온 동생이 아버지께 이렇게 말했답니다. “누나가 다니는 교회는 공산주의도 아니고, 민주주의도 아닙니다. 앞으로 올 새로운 사상, 새로운 주의를 말하고 있습니다. 공생·공영·공의 주의라고 합니다.”
아버지께서는 그 말을 들으시고는 “공생·공영·공의가 옳은 일이다. 그렇다면 문제가 될 것이 없구나.”라고 하셨습니다. 아버지께서는 항상 “너희가 부잣집 자식이라도 가진 것을 독차지하지 말고, 반은 항상 나누어라”라고 가르치신 분이셨습니다. 아버지께서는 무엇을 하나 사도 먼저 학교에 기증을 하셨습니다. 공 하나를 사도 학교에 보내고, 과학 도구나 녹음기를 사도 항상 먼저 학교에 두셨습니다. “학교에는 수백 명이 혜택을 받지만, 우리 집엔 여덟 남매만 있지 않느냐.”라고 말하시며 늘 남에게 베푸셨던 분이었습니다. 그런 아버지셨기에, 제가 퇴학을 맞더라도 꾸중 한 번 들어본 적이 없었습니다.
고생 속에서도 당당했던 개척 노정
그렇게 시작한 개척 전도 시절은 쉽지 않았습니다. 먹을 것이 없어 보리밥과 국수, 소금으로 끼니를 때우던 날도 많았습니다. 하지만 식구들이 함께 모여 나눠 먹으니 그마저도 감사했습니다. 그때는 잠을 잘 방 하나 없어서 이 집 저 집을 옮겨 다니며 잠을 잤습니다. 부잣집의 딸로 자라 처음에는 아무 데서나 자고 하는 일이 낯설고 힘들기도 했지만, 제가 가는 길은 언제나 하늘이 준비해 주셨기에 많은 사랑과 놀라운 은혜가 가득했습니다.
1961년, 저는 이재석씨와 36가정 축복을 받았습니다. 우리 부부는 서로 이해하고 도우며, 어떤 어려움 속에서도 전도와 교회 일을 멈추지 않았습니다. 첫아이를 임신했을 때는 개척 전도를 나가 먹을 것이 없어 산에 올라 쑥을 뜯어 끼니를 대신한 적도 있었습니다. 남편도 간경화와 폐결핵이 겹쳐 각혈하며 피를 쏟을 만큼 건강이 좋지 않았지만, 단 하루도 쉬지 않고 일을 했습니다. 많은 어려움이 있었지만, 그럴 때마다 저는 남편을 이해하고 도왔으며, 남편은 저를 사랑으로 감싸 주었습니다.
한 번은 아들을 업고 청파동을 지나가는데 우연히 마주친 고등학교 동창이 저를 보고 울상으로 “강정원, 어떡해…” 하더군요. 예전의 부잣집 딸의 모습은 온데간데없고 당시 제 모습이 너무 초라해 보였던 모양입니다. 그러나 저는 하나도 부끄럽지 않았습니다. 아주 당당했습니다. 외판원, 보험사원, 보따리 장사, 통화 안내원, 양장점, 중국집 등 여러 일을 했습니다. 지금의 일이 교회 일에 조금이라도 보탬이 된다면 어떤 일이든 마다하지 않았습니다.
고생이 무엇인지도 몰랐던 제가, 어떻게 그런 고생의 길을 걸어올 수 있었는지 돌이켜보면 오로지 참부모님과 말씀의 힘으로 가능했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어떤 고생 속에서도 부끄러운 적이 없었습니다. 가진 것이 없어도 행복했습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하늘부모님과 참부모님을 모시고 있고, 앞으로 이 땅에 지상천국을 이루어야 할 책임을 갖고 있는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참어머님과 함께했던 따뜻한 기억들
저는 참어머님을 가까이 모실 수 있는 기회가 많았습니다. 어머님과 미국에 가서 한 침대에서 자기도 하고, 어머님께서 직접 제게 스크램블이나 토스트를 해주시거나, 커피를 끓여 주시기도 했습니다. 저는 참어머님과 아주 다정한 생활을 했던 기억이 많습니다. 그 속에서 저는 참어머님께서 얼마나 따뜻하고 사랑이 깊은 분이신지를 느꼈습니다.
1992년에는 참어머님을 모시고 중국 순회에 동행했습니다. 등소평의 아들 등박방 씨가 우리를 초청한 일정이었습니다. 등박방 씨는 참어머님을 처음 뵙고는 “봄날의 꽃이 피어 들어오시는 것 같다”라고 표현했습니다. 그 정도로 참어머님께서 아름다우셨습니다. 이후 열린 대회에서 어머님께서는 무신론 국가인 중국에서 처음으로 ‘하나님’이라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당시로서는 감히 상상도 못 할 일이었습니다. 참어머님께서는 중국 여성 지도자들 앞에서 하늘의 뜻을 전하셨습니다. 대회를 마친 후에는 참어머님께서 손목에 차고 계시던 시계를 풀어 중국의 여성부장에게 직접 선물로 건네주셨습니다. 참어머님께서는 언제나 사람들을 따뜻하게 이끌고, 참사랑으로 베푸시는 분이라는 것을 다시금 느꼈습니다.
작년 제 나이가 90이 되었을 때, 예배 날 천원교회에 떡을 나누며 감사를 드렸습니다. 그런데 그 영상을 참어머님께서 보시고 저를 직접 불러 주셨습니다. 이후 참어머님과 오찬을 함께하며 대화를 나누었습니다. 저는 참어머님을 저희 친정어머니보다 더 가깝게 느낍니다. 심정적으로 더욱 깊게 이어져 있다고 할까요? 그래서 저는 참어머님과 거리감이 없습니다. 참어머님께서는 누구에게나 같은 사랑으로 대해 주시는 인류의 어머니십니다.
자랑스러운 통일교인의 삶
내가 한 가지 기억에 남는 일이 있습니다. 어느 날 롯데호텔 식당에서 식사하는데, 제 맞은편에 기독교절제회 회장님이 앉아 계셨습니다. 그분은 이승만 대통령을 가까이 모셨던 분으로, 따님 한 분은 하버드 대학을, 다른 한 분은 영국에서 신학 공부를 했다고 합니다. 대화를 나누다가 저에게 “어느 교회 다니세요?” 하고 물으셨습니다. 제가 통일교회를 다닌다고 답을 하니 그분이 깜짝 놀라며 묻더군요. “아니 왜 그런 교회에 다니느냐?”고요.
그래서 나는 말했습니다. “통일교회는 장로교나 감리교뿐 아니라, 모든 세계 종교와 민족 종교를 포용한 진리를 지니고 있습니다.” 내가 통일교를 믿는다는 말에 안타깝게 여기던 그분은, “그렇다면 통일교에 대해 제가 연구해 보겠다”라고 하셨습니다. 세상이 우리를 얼마나 모르고 있는지를 많이 느낍니다. 그래서 나는 언제나 사람들을 만날 때마다 숨지 않고 당당히 통일교인이라고 이야기합니다.
요즘 세상은 돈으로 사람의 가치를 재려 합니다. 하지만 인생은 결코 돈으로 바꿀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통일가의 삶이 때로는 세상의 눈으로 봤을 때 비참해 보일지 몰라도, 우리는 하늘이 주신 참된 의미와 가치를 지니고 있습니다. 이 교회는 하늘부모님만이, 참부모님만이 세운 교회가 아닙니다. 1세와 2세가 함께 세운 교회입니다. 참부모님께서도 그렇게 말씀해 주셨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자부심과 긍지를 가지고 이 교회를 더 발전시켜야 하지 않겠습니까. 내 생명과 같은 교회에 내가 적극적으로 참여해야 합니다. 저는 앞으로 통일가의 모든 축복가정이 더욱 당당히 세상 앞에 나아가면 좋겠습니다. 우리 스스로 자랑스러운 통일교인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