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Q. 어린 시절 회장님께서는 어떤 가정에서 자라셨나요?
“저의 아버지는 한국에서 최초로 유도 10단을 받은 분으로, 사람들은 ‘유도의 성인’이라 불렀습니다. 일제강점기 시절 일본의 한 대학에서 법학을 전공하셨을 만큼 지성과 인품을 겸비하신 분이셨지요. 지금도 세계 곳곳에 있는 제자들이 아버지 묘소를 찾아 눈물을 흘릴 만큼, 그는 참으로 존경받는 스승이셨습니다. 무도인으로서는 엄격했지만, 가족에게는 한없이 다정한 남편이자 따뜻한 아버지셨습니다.
어머니께서는 이화여자대학교 영문학과 교수로 재직하셨습니다. 제가 다섯 살 무렵, 어머니는 미국으로 교환교수로 가셨는데, 곧 6·25 전쟁이 발발하면서 귀국이 막혀 4년 동안 생이별을 겪어야 했습니다. 전쟁이 끝난 뒤에서야 비로소 다시 만나게 되었고, 여러 어려움 속에서도 우리 가족은 그 시절 모든 이가 부러워할 만큼 평화롭고 화목했습니다.
그러던 1954년, 어머니께서 통일교회에 입교하셨습니다. 어머니는 매일 밤늦게까지 교회에서 시간을 보내셨고, 통행금지 시절이라 집에 들어오지 않으실 때가 많았습니다. 아버지는 그런 어머니를 이해하지 못하셨습니다. 당시 언론이 통일교회를 ‘이단’이라 몰았던 터라, 아버지의 반대는 더욱 격렬했습니다. 가족의 갈등은 깊어졌고, 결국 어머니는 어느 날 아무 말씀도 남기지 않은 채 집을 떠나셨습니다.”

Q. 교회에 입교하실 때의 상황을 알고 싶습니다.
“당시 저는 전국에서도 손꼽히는 유도 선수였고, 학업 성적도 상위권이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갑작스러운 부상에 이어 늑막염이 찾아왔습니다. 결국 운동도, 대학 진학도 포기해야 했습니다. 모든 것이 한순간에 무너진 듯한 절망의 시기였습니다. 인생이란 무엇인가, 왜 살아야 하는가를 고민하며 철학서와 종교서를 뒤적였지만 아무리 찾아도 답을 얻지 못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불현듯 마음속에 울림이 왔습니다. ‘통일교를 한 번 알아봐라.’ 이유를 알 수 없는 강한 확신이었습니다. 그곳에서 처음 들은 ‘원리 말씀’에 깊은 감명을 받았습니다. 인생의 목적과 하늘의 뜻이 이렇게 명확하게 설명될 수 있다는 사실이 놀라웠습니다. 이후 3개월 동안 말씀 공부에 몰두했고, 결국 가족과 친구들의 극심한 반대 속에서도 통일교회에 입교하기로 결심했습니다.”
입교 후에는 여러 차례 참부모님을 가까이에서 뵐 기회가 있었다.
“어느 날 전도대원 모임이 있었습니다. 저는 전도대원은 아니었지만, 말씀을 듣기 위해 조용히 뒤쪽에 앉아 있었습니다. 그런데 참아버님께서 제 쪽을 바라보시며 ‘준호! 껌 씹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저는 순간 놀랐습니다. 왜냐하면, 참아버님께 제 이름을 말씀드린 적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날이 참아버님으로부터 직접 이름을 불리며 말씀을 들은 첫 순간이었다.
“그 말씀은 단순한 훈계가 아니었습니다. 마치 친아버지가 아들에게 조용히 타이르듯, 깊고 다정하게 깨우쳐 주시는 순간이었습니다.
‘아, 참으로 하늘부모님께서 나를 부르셨구나.’ 하는 깨달음이 밀려왔습니다.”
참아버님께서는 제가 언제 올 지를 꼭 알고 계셨던 것 같습니다.
“당시 참아버님께서 세계 성지책정을 마치시고 귀국하실 때, 어머니께 아들들의 소식을 물으셨다고 합니다. 어머니께서 ‘제가 집을 떠난 지 10년이 넘었고, 한 번도 연락이 없었습니다’라고 말씀드리자, 참아버님께서 ‘아들 중 한 사람이 들어올 때가 되었다’고 하셨다는 겁니다. 나중에 날짜를 계산해보니, 그 말씀이 바로 제가 원리 말씀을 듣기 시작한 시기와 정확히 일치했습니다.”
Q. 공직을 시작하시면서 많은 어려움이 있으셨을 것 같습니다.
“입교 후 아버지의 반대가 시작되었습니다. 제가 교회로 나가려 하면 아버지는 소리를 지르며 문을 막아서셨습니다. 월남전에 3년간 참전하고 돌아온 뒤에도 그 경계는 풀리지 않았습니다. 어느 날 새어머니께서 ‘네가 있으면 아버지 혈압이 오르시니 나가야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래서 아버지께 집을 떠나겠다고 말씀드렸습니다. 그러자 아버지께서 점심을 함께하자고 하셨습니다. 식사 자리에서 아버지는 통곡하셨습니다. ‘가장 사랑했던 네 어머니가 나를 떠났는데, 이제 사랑하는 아들까지 나를 떠나는구나.’ 그리고는 눈물을 훔치시며 ‘성공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 한마디가 앞으로 걸어갈 평생의 신앙길의 결의가 되었다.
“세상의 눈으로는 불효자일지 모르지만, 하늘의 뜻에서 승리해 아버지께 참부모님의 가치를 깨닫게 해드리고, 기쁨의 눈물을 흘리게 해드리자고 다짐했습니다. 그 결의로 저는 집을 떠나 공직의 길을 시작했습니다.”
1970년, 777가정으로 축복을 받고 본격적인 공직의 길에 올랐다.
“그때는 정말 아무것도 없는 시절이었습니다. 제가 처음 부임한 동두천교회는 진흙 바닥 위의 작은 가정집이었습니다. 마루도 없고, 천장은 비가 새서 얼룩이 지도처럼 번져 있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뜻밖의 방문이 있었다.
“전도를 나가려던 순간, ‘뚜벅뚜벅’ 발소리가 들렸습니다. 문을 열어보니 참아버님께서 지프차를 타고 순회 중에 오신 것이었습니다. 놀라서 좁은 방에 모셨더니, 아버님께서 천장을 보며 ‘이건 뭐냐’고 물으셨습니다. ‘비가 새서 그렇습니다’ 하니, 주머니에서 돈을 꺼내 주시며 ‘수리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참부모님께서는 세세한 부분까지, 자녀 한 사람의 생활까지 마음에 두고 계신 분이시구나. 작고 가난한 교회였지만, 그곳에서 저는 참된 목회의 출발을 배웠습니다.”


Q. 1970년대 참부모님의 부르심으로 미국으로 가셨다고 알고 있습니다. 그때의 미국 사회 분위기는 어땠나요?
1972년 2월, 참부모님의 부르심을 받고 오른 미국길.
“그 시절 미국 사회는 우리를 ‘무니(Moonie)’라고 부르며 조롱했습니다. 참부모님께서 1974년 메디슨 스퀘어 가든, 1976년 양키스타디움, 워싱턴 모뉴먼트 대회를 통해 미국을 뒤흔드셨지만, 동시에 세속 언론과 좌익 세력, 일부 기성교회로부터 거센 비난이 쏟아졌습니다.”
워싱턴포스트와 뉴욕타임스에는 하루가 멀다 하고 통일교를 공격하는 기사가 실렸다. 그 여파는 현지 회원들뿐 아니라 참자녀님들에게까지 미쳤다.
“효진님께서도 학교에서 ‘무니의 아들이 아니냐’는 조롱을 받으셨다고 합니다. 자기를 욕하는 건 참을 수 있어도 참부모님을 모욕하는 건 견딜 수 없으셨던 효진님께서 결국 싸움을 하셨는데, 오히려 그 일로 효진님만 처벌을 받으셨습니다. 그날 하루 종일 교정 구석에서 울고 계셨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 제 가슴이 미어졌습니다.”
당시 먹먹했던 감정은 여전히 참기 힘든 순간이었다.
“저희 큰아이도 학교에서 친구들에게 ‘무니’라며 침을 맞은 적이 있습니다. 어린 나이에 그 상처를 견디는 것이 얼마나 힘들었을지, 부모로서 마음이 아팠습니다. 어릴 적 저 역시 어머니 문제로 교회에 대한 아픔을 겪었는데, 제 자녀들까지 같은 상처를 겪게 된 것입니다.”
그 시절, ‘무니’라는 단어는 단순한 별명이 아니라 사회적 낙인이었다.
“하지만 우리는 참부모님을 믿었기에 버틸 수 있었습니다. 비난의 소리보다 더 크게 들린 것은 참부모님께서 인류를 향해 흘리신 눈물이었습니다. 그 눈물을 생각하면, 세상이 던지는 돌도 감사로 받을 수 있었습니다.”
Q. 회장님께서는 오랜 기간 동북 대륙 메시아로서 활동을 하셨는데요. 당시 상황에 대해서 설명해주실 수 있을까요?
참부모님께서는 러시아, 중국, 몽골을 포함한 광대한 지역을 ‘동북 대륙’이라 이름하셨다.
구소련의 15개 공화국과 몽골, 중국, 북한까지 아우르는 거대한 영토였다.
“그때 참부모님께서 제게 말씀하셨습니다. ‘너는 대륙 메시아다. 앞으로 대륙 메시아 시대가 온다.’ 저는 그렇게 마지막 대륙 메시아로 임명되었습니다.”
1990년 4월, 참부모님께서는 소련을 방문하시어 미하일 고르바초프 대통령과 회담을 가지시고, 모스크바 대회를 승리로 이끄신 뒤 한국을 거쳐 미국으로 향하셨다. 그리고 그때부터 미·소 학생 교류가 추진되기 시작했다.
“처음엔 300명이었지만, 1년 만에 3,000명으로 늘었습니다. 당시만 해도 미국과 소련 간의 교류는 거의 불가능에 가까웠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평화의 다리’를 놓을 수 있었습니다. 그것은 참부모님께서 개척하신 하늘의 길이었기 때문입니다.”
이후 러시아, 중국, 몽골을 오가며 18년간 선교활동을 이어갔다.
“그 시절엔 원리 책 한 권만 가지고 있어도 감옥에 갈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영계를 알고 있었습니다. 내가 고생한 것은 반드시 영계에 기록된다는 확신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시련이라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그 시련이 보람이었고, 하늘이 주신 기쁨이었습니다.”
지금도 잊을 수 없는 1999년의 한 사건이 있다.
“그때 참어머님께서 다음 날 중국 인민대회당에서 강연하실 예정이었습니다. 몽골을 거쳐 북경에 도착하신 참어머님께서 영빈관에서 휴식을 취하고 계셨는데, 밤 9시에 급히 연락이 왔습니다. ‘내일 한학자 여사의 강연은 취소되었습니다.’는 소식이었습니다.”
당시 분위기는 침통했고, 많은 이들이 ‘대회가 무산되었다’며 낙담했지만, 포기할 수는 없었다.
“저는 관리 책임자를 찾아가 밤늦게 그의 집을 두드렸습니다. 밤 11시, 그가 잠옷 차림으로 문을 열었고, 저는 새벽 3시까지 그를 설득했습니다. 단순한 논리가 아니라, 하늘의 심정을 붙들고 호소했습니다. 그리고 결국, 다음 날 참어머님께서는 예정대로 인민대회당 무대에 오르셨습니다.”
그날의 강연은 역사적인 순간으로 기록되었다.
“대회가 끝난 후, 참석했던 VIP들은 모두 ‘이보다 감동적인 강연은 없었다’며 엄지를 들어 올렸습니다. 그날 저는 깨달았습니다. 절박한 심정은 영계를 움직입니다. 그리고 하늘의 뜻을 이루기 위한 정성에는 반드시 기적이 따릅니다. 만약 그날 인민대회당 강연이 무산되었다면, 이후 섭리의 흐름은 달라졌을지도 모릅니다. 그날 밤 저는 확신했습니다. 참부모님을 향한 절대신앙과 정성은 시대를 바꾸는 힘이 된다는 것을.”

Q. 지난 60년의 공직 여정은 회장님께 어떤 의미일까요?
2008년, 참부모님의 부르심을 받고 다시 한국으로 돌아온 후, 세계선교본부 부회장과 한국협회장을 맡으며 국내 섭리의 중심에서 활동했다.
“2016년에는 참어머님께서 직접 맡고 계시던 두 이사장직을 제게 맡기시며 ‘석준호에게 맡긴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 말씀을 평생 잊지 못합니다.”
이후 글로벌재단 이사장과 선문학원 이사장으로 봉직했으며, 천재원 원장과 천일국 최고위원으로 섭리의 중추를 맡았다.
“2018년에는 참어머님께서 ‘석준호는 이제 모든 것을 내려놓고 무도 섭리에 전념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때부터 저는 참부모님께서 사랑하신 무도를 통해 세계를 향한 전도의 길을 걷고 있습니다.”
참부모님께서는 젊은 시절 씨름과 유도를 즐기셨고, 무도를 통해 심신의 조화를 강조하셨다.
“저 역시 무도가 전도의 도구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지금까지 여러 나라를 오가며 무도 섭리에 전념해왔습니다.”
어느덧 마주한 60년의 공직 생활.
“하늘 앞에서 부끄럽지 않게 살고 싶었습니다. 그 마음 하나로 지금까지 걸어왔습니다. 그래서 한 치의 후회도 없습니다.”
그 뒤에는 언제나 믿고 이해해 준 가족의 사랑이 있었다.
“평생 참부모님을 모시며 살다 보니, 1년에 집에 있는 날이 20일도 안 될 때가 많았습니다. 가족에게는 늘 미안했지만, 묵묵히 이해하고 함께해준 가족들에게 지금도 고맙습니다.”
자신의 생애를 단 한 문장으로 정리한다면 그것은 감사와 행복의 연속이었다.
“돌아보면 제 뜻대로 된 것은 하나도 없습니다. 통일교회에 들어오게 된 것도, 미국과 러시아, 중국, 몽골에서 활동한 것도 모두 제가 원해서 한 일이 아니었습니다. 다만 부름이 있었고, 저는 그 부름에 응답했을 뿐입니다. 인류의 구세주이시며 메시아이신 천지인 참부모님을 직접 모시고 살아갈 수 있었던 시대에 살았다는 것, 그것만으로도 제 생애는 감사와 행복의 연속이었습니다.”
Q. 끝으로 축복가정에게 전하고 싶은 메시지가 있으실까요?
“무엇보다 지금 우리가 가져야 할 것은 희망입니다. 저는 그 희망을 네 가지로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첫째는 심정의 상속이다.
“우리 교회의 뿌리는 심정입니다. 하늘부모님의 심정, 참부모님의 심정입니다. 우리는 그 심정을 상속받아 충효와 효정의 도리를 실천해야 합니다.”
둘째는 존경받는 교단과 축복이상가정의 실현이다.
“우리가 먼저 변화해야 합니다. 사회로부터 존경받는 교회, 존경받는 가정, 존경받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셋째는 화합과 통일의 심정문화 공동체 건설이다.
“서로 분열하지 않고 하나가 되어야 합니다. 참부모님 중심의 사랑과 정이 넘치는 공동체를 세워야 합니다.”
넷째는 신종족메시아의 사명과 책임 완수다.
“우리가 책임을 다하면 천일국은 앞당겨질 수 있습니다. 그 희망을 붙들고 일대일 전도를 지속해야 합니다. 전도에는 희망이 있습니다.”
그의 목소리는 담담했지만, 그 안에는 여전히 불타는 신앙의 열정이 느껴졌다.
“하늘부모님과 참부모님께서 저희에게 주신 사명은 결코 작지 않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희망을 놓지 않는다면, 천일국의 새 시대는 반드시 우리 손으로 이루어질 것입니다.”